[image1]대한민국 국방부가 ‘북한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서해북방한계선(NLL) 인근 함박도가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영토였다는 증거가 또 나왔다.1965년 10월 29일 발생한 북한의 우리 어민집단 납치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들을 통해서다.1965년 10월 30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의 큰 제목은 ‘서해 말도 근해서 북괴 무장선에 50여명이 조개 캐다 집단 피랍’이었다.어민들이 ‘서해 말도 근해에서 조개를 캐다 집단적으로 피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신문 1면에 실린 지도에는 함박도가 휴전선 아래
“친박 권력의 자폐적 속성이 그 원인이다. (중략) 이번 총선으로 친박은 정치적으로 죽었다. 부산, 서울 강남, 분당이 여당을 거부했으면 거의 탄핵이고 사망선고다.”(조선일보 5월 19일자 ‘양상훈 칼럼’) “(새누리당은) 외눈박이 종만 설치는 흉가 같다. 갈라파고스섬처럼 교류와 진화가 중단된 곳. 그게 박 대통령이 원하는 당인가 보다.”(중앙일보 5월 19일자 ‘전영기의 시시각각’) “친박은 작은 권력을 지키려다 국민에게도, 박 정권에도 더 큰 죄업을 쌓고 있다. 친박이라는 명칭이 희대의 정치적 오명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문화
4·13 총선 전, 대표적 친노(親盧)인 유시민 전 장관은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 창당을 “안철수의 혁명적 패배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바둑 격언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를 예로 들었다. ‘내가 두 집을 확보해서 일단 살아남고, 그 다음에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의미다. 유씨는 “안철수는 중원에 있는 집을 모두 내주고, 귀퉁이에 두 집을 지었다”고 했다. 하수(下手)라는 것이다. 여기서 귀퉁이는 호남, 중원은 서울과 수도권을 뜻한다.한 달 전만 해도 국민의당은 잿빛 전망뿐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원내교섭단체(20석)를 겨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2014년 12월 19일)에 충격받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대남 혁명역량 약화를 우려해 새로운 종북(從北) 정당 건설과 총선·대선 개입을 지시한 것으로 파악됐다.이 같은 김정은의 지시는 발언록(‘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께서 2015년 1월 5일 노동당 간부회의에서 하신 말씀’)으로 정리돼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 등 대남 공작부서에 전달됐다. 김정은 발언록을 입수한 보수 성향 시사지 ‘미래한국’에 따르면, 김정은이 노동당 간부회의를 소집한 것은 작년 1월 5일. 통진당이 해산한 지
“당신은 어느 편인가? 친일인가, 반일인가? 정의인가, 불의인가?”광복 후 70년이 지났지만 이 양자택일의 질문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답변을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린다. ‘친일인명사전’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강제 배포하고 있는 세력은 순수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이 질문을 즐겨 쓴다.정부 누리예산 편성을 거부했던 서울시 교육청이 서울시내 일선 학교에 ‘친일인명사전’ 구입 예산을 내려보냈다. 583개 학교 중 558개교가 ‘친일인명사전’을 구매했다. 경기도 교육청도 지난해 책정한 ‘친일인명사전’ 배포 예산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여러 차례 “파벌이나 계보를 구(舊)정치의 산물로 혐오한다”고 했지만 친박(친박근혜)이란 계보는 새누리당 내 엄연히 주류다. 친박이 있으니 비박이 존재하고 ‘진박(진짜 박근혜)’이란 조어가 생겨났다.그런데 이 친박 계보라는 게 특이하다. 느슨한 결사체와 같다. 언젠가 기자는 친박계 ‘대변인’ 격인 이정현 최고위원을 만나 친박의 실체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친박계가 누구냐? 울타리는 없다. 누구든지 (친박이란 울타리를) 넘나든다. (친박 의원 수를) 파악하지도 않고 울타리에 가두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박
고(故) 김지태 삼화그룹 회장이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을 포함해 토지 10만147평(33만1064㎡)을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헌납’한 것을 두고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이 가운데 토지 기부는 언론사 헌납보다 상대적으로 점화(點火)가 덜 됐으나 김 회장 유족들은 이 땅 역시 ‘기부’가 아니라 ‘강탈’의 범주에 넣고 싶어 한다. 이에 대해 정수장학회 측은 “그 땅은 처음부터 국방부 소유였다. 우리와 상관없다”고 맞선다. 당시 토지 헌납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김지태씨가 1962년 당시 헌납한 토지 ‘253